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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조, 피카레스크 악당에게 열광한 이유

by 단단늘보 2026. 3. 31.

목차

  • 악이 악을 처단할 때 — 피카레스크 정의의 모순과 현실
  • 법이 지키지 못하는 곳에서 — 부조리한 사회가 만든 다크 히어로
  •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 코미디와 따뜻함이 서사를 살리는 방식

 

 

악당이 정의를 구현한다는 설정, 처음엔 이게 맞는 건가 싶었습니다. 마피아 출신 빈센조 카사노(송중기)가 거대 기업과 권력의 비리를 마피아식으로 처단하는 이 드라마는 2021년 방영 당시 높은 시청률과 함께 강렬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통쾌하다는 반응과 동시에 폭력을 미화한다는 비판도 공존했는데, 직접 보면서 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악이 악을 처단할 때 — 피카레스크 정의의 모순과 현실

빈센조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악이 더 큰 악을 무너뜨리는 게 과연 맞는 걸까. 마치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을 재판하고 영웅이 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되면 결국 바늘 도둑의 악을 허용하는 암묵적인 룰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런 서사 방식을 피카레스크(Picaresque) 라고 합니다. 피카레스크란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악당이나 사기꾼이 주인공이 되어 부조리한 사회를 헤쳐나가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빈센조는 이 피카레스크 구조를 통해 법과 제도가 온전히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합니다.

 

다만 이 설정은 사적 복수의 정당화(Justification of Private Revenge) 라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합니다. 사적 복수의 정당화란 개인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스스로 판사와 집행자가 되는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마피아를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폭력을 정의의 수단으로 미화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드라마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 뒤에 이런 윤리적 질문이 남는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이 지키지 못하는 곳에서 — 부조리한 사회가 만든 다크 히어로

그렇다면 왜 많은 시청자들이 빈센조에 열광했을까요.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우리가 마피아를 만나는 경험보다 사회에서 부조리함을 느끼는 경험이 훨씬 더 일상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거대 기업과 권력이 오히려 더 큰 악으로 느껴지고, 그들을 처단하는 빈센조에게 기쁨과 통쾌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늘 그런 부조리함에 억압되어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대리만족(Vicarious Satisfaction) 입니다. 대리만족이란 현실에서 직접 실현하지 못하는 욕구나 감정을 타인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시키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현실에서 정·경·검 유착과 부조리한 권력 구조 앞에 무력감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빈센조를 통해 대리만족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흥행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완전히 불공평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지킴받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군부대가 있기에 어떤 나라도 함부로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공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법과 행정이 지켜주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빈센조가 보여주는 세계가 현실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에서, 드라마적 과장을 즐기되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공익신고 처리 건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제도적 정의 실현의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출처: 국민권익위원회 연간 보고서, 2023).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 코미디와 따뜻함이 서사를 살리는 방식

빈센조의 가장 큰 강점은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무겁지 않게 만드는 힘에 있습니다. 국정원 요원이 송중기의 팬이 된다는 설정이나, 전여빈의 "~할 거예요" 말투가 절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처음엔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그 전환이 오히려 극의 리듬감을 살려줬습니다.

 

이를 장르 크로스오버(Genre Crossover) 라고 합니다. 장르 크로스오버란 서로 다른 장르적 요소를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혼합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빈센조는 범죄 스릴러, 블랙 코미디, 사회 풍자를 동시에 구사하면서도 각 요소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무엇보다 부조리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빈센조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장면들에서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냉혹한 마피아가 금가빌딩 사람들과 밥을 나눠 먹고 그들을 지키려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공동체와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캐릭터들 간의 이런 케미가 서사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풍성하게 만든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빈센조는 악당이 정의를 구현한다는 모순적인 설정 위에서, 법이 닿지 않는 곳의 부조리함을 유쾌하게 풍자하고 공동체의 따뜻함으로 마무리하는 작품입니다. 통쾌함과 윤리적 질문을 동시에 남기는 드라마. 보는 내내 웃다가 마지막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빈센조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